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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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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대학교 박물관은 1973년 향토관에서 출발하여 1981년에 대학박물관으로 정식 개관하였고, 2008년에는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하여 창원지역의 유일한 국공립 박물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1년 함안, 창원 일대의 가야문화권 유적 지표조사를 시작한 이래 경남, 울산 지역을 중심으로 발굴·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선사부터 현대에 이르는 12,000여 점의 고고·역사·민속 유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시대별, 유적별로 대표할 수 있는 유물들을 선정하여 ‘상설전시실’에서 선보이고 있습니다. 경남지역에서는 동시에 접하기 어려운 신라와 가야의 유물 전시하고 있으니, 비교 검토하며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창원의 공룡발자국화석

창원지역에서는 진동 고현리 · 내서 호계리 · 정병산 · 대암산 · 무학산 · 천주산 일원에서 공롱발자국화석이 발견되었다. 이들 지역은 경상누층군, 하양층군, 진동층에 해당한다. 공룡발자국화석이 확인된 곳은 현재 모두 산이지만, 공룡이 살던 중생대 백악기에는 큰 호숫가였다.
확인된 공룡발자국은 4족 보행을 하는 초식공룡의 것이 대부분이고, 2족 보행을 하는 육식공룡의 발자국도 일부 조사되었다. 특히 대암산의 4족 발자국은 다리 길이만 4~5m 정도 되는 대형 초식 공룡의 것으로 추정된다.

구석기 시대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도구를 만들고 불을 이용하던 최초의 문화단계로, 한반도에서는 약70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사냥과 채집생할을 하였으며, 식량이 풍부한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강가나 동굴에서 살았다.
경상남도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거창 임불리, 밀양 고례리, 진주 내촌리, 사천 이금동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몸돌, 격지, 돌날 등이 있다.


창원지역에서는 아직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인근 밀양 고례리, 함안 용산리 · 도항리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된 바 있어 창원지역에도 구석기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시대에 인류는 빙하기 이후 달라진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이 토기와 간석기 등의 도구를 만들고 정착 생활을 시작하였다. 신석기인들은 물과 식량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움집을 짓고, 고기잡이와 사냥 · 채집을 하면서 살았다. 또한 초기 농경이 시작되어 조 · 수수 · 보리 등 일부 작물을 재배하였다.


창원 인근의 신석기시대 주요 유적으로는 진해의 안골패총 · 수도패총 · 남양동유적, 동읍 합산패총, 김해 수가리패총 · 농소리패총, 창녕 비봉리유적 등 모두 남해안과 낙동강 주변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 유적의 입지로 볼 때 신석기시대 해수면은 지금보다 약 5m 이상 높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낙동강 내륙에 위치하는 비봉리유적, 합산패총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인들의 고래사냥

신석기시대 유적인 울산 황성동유적에서 ‘작살 맞은 고래 뼈’가 발견되어,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고래잡이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엄청난 양의 고기는 물론, 뼈와 기름, 가죽 등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래는 인간의 중요한 식량자원이자 생업도구로 활용되었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시대에는 청동기의 제작, 농경의 본격화, 대규모 취락 형성, 집단 내에서 사회적 계층화가 이루어진 시대이다. 청동기는 권위의 상징물 이나 의기로 사용되었고, 일상생활에서는 신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간석기, 목기, 골각기가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창원의 남산유적 · 성산패총 · 상남동유적, 동읍 덕천리유적, 진동유적 등이 있으며, 이들은 한국 청동기시대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창원 남산유적

창원 남산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축조된 복합유적으로 해발 100m의 독립 구릉 정상부에 입지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주거지와 패총이 있는 대규모 환호취락이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타원형의 환호는 폭 4~10m, 깊이 2.5~4m 규모이다. V자 형태로 굴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다량의 의례용 유물, 망루, 중앙광장, 대규모 환호의 존재로 보아 방어와 의례 기능을 가진 창원지역의 중심취락임을 알 수 있다.

의례

선사시대 사람들은 죽음으로써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 같은 삶이 사후세계까지 이어진다고 믿었다. 따라서 죽은 자가 내세에서도 그 지위와 힘을 유지하길 바라며 다양한 의례를 행하였다. 의례와 관련된 유물로는 복골, 광택이 나는 붉은간토기 등과 다양한 장신구들이 있다. 장신구는 단순히 치장의 의미가 아닌 착용자의 사회적 신분, 지위, 성을 나타내는 도구였다.
창원 남산유적의 환호에서는 완형의 붉은간토기, 그리고 고의로 파손한 반달돌칼, 복골 등이 확인되고 있어 의례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채집

채집에는 특별한 기술이나 도구가 필요 없기 때문에 인류가 가장 손쉽게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며 식량 확보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산지 뿐 아니라 강과 바다를 직접 접하고 있는 창원지역은 채집을 통한 생업활동에 유리하였다. 창원지역패총에서는 줄소라 · 피뿔고동 · 백합 · 참굴 · 소라 · 바지락 등의 어패류가 확인되며, 그 중에서도 장신구로도 활용된 굴과 줄소라가 가장 많다.
인근의 비봉리유적에서는 도토리 · 가래 · 솔방울 · 밤 등이 출토되었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망태기도 확인되었다.

수렵

수렵은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한 주요수단으로 생업활동에서 농경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한다. 창원지역 패총에서는 사슴 · 멧돼지 · 노루 · 오리 · 꿩의 뼈가 출토되었고, 그 중 사슴 뼈가 가장 많다. 사냥한 동물의 고기는 식용으로, 가죽은 옷감으로, 뼈는 골각기 제작을 위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사냥 도구로는 석창, 석촉, 골촉, 투석구 등이 있으며, 함정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어로

창원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많은 패총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해수면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것을 의미한다.
패총에는 상어 · 참동 · 흑돔 · 복어 · 가오리 등의 어류 뼈들이 나타나고, 그 중 참돔과 복어의 뼈가 가장 많다. 그 외에도 강치 · 돌고래 · 고래 · 바다표범 · 물개 등의 포유류 뼈도 함께 출토되어 당시 창원지역의 식문화와 해양생태계를 추정할 수 있다.
어로에 사용되었던 도구로는 석제작살, 골제작살, 그물추, 낚싯바늘 등이 있다.

농경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농경은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졌고, 청동기시대에서 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농경에는 주로 돌, 나무 등으로 만든 도구가 이용되었다. 땅을 일구기 위한 괭이 · 보습 · 가래 · 도끼, 수확 도구인 발달돌칼 · 돌낫, 수확물을 가공하기 위한 갈돌과 갈판, 운송 · 저장 · 요리를 위한 다양한 토기 등이 있다.
주거지에 탄화된 콩 · 녹두 · 수수 · 팥 · 쌀 · 보리 등이 확인되어 당시 다양한 곡물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야

가야는 낙동강 하류 변한지역에서 풍부한 철 자원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낙랑과 왜에 철을 공급하면서 국제교역의 중심이 되었고, 3세기 후반 새로이 북방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금관가야는 쇠퇴하게 되고, 대가야 중심의 후기 가야가 시작되었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에서 ‘대왕’ 이란 글자가 새겨진 토기와 화려한 금관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신라, 백제와 힘을 겨룰 만큼 강한 세력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창원지역에는 골포국 · 탁순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마산만과 낙동강을 통해 교류와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 · 발전하였다.

창원 도계동유적

도계동유적은 삼한시대 목관묘 · 목곽묘를 비롯한 4~5세기 목곽묘 · 석곽묘 · 옹관묘가 확인 되어, 창원지역 고분의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유구의 규모, 유물, 입지 등을 고려할 때 창원지역의 중심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가야 및 신라 · 왜 등 다양한 지역색을 가진 토기들이 다량 확인되어 창원지역에서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야시대 수전 · 수로 · 고상건물지 등의 생활 · 생산유적을 통해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창원 천선동고분군

천선동고분군은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초반까지 조성되었고, 주 묘제는 석곽묘이다. 고분 내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신라계 토기와 소가야계 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백제계 토기인 조족문토기와 유공광구소호가 출토되어 신라, 백제와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13호분의 장경호 구연부, 14호분의 고배 대각, 15호분의 파수부호 대각 등 특정부위를 파손하여 부장하는 독특한 장송의례도 확인된다.

창원 반계동유적

반계동유적은 고분군, 생활유적 (고상건물지, 우물, 주거지, 배수로), 생산유적 (수전, 농로, 논둑), 폐기장 (패총) 등이 발견되어, 창원지역 가야시대 마을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대부분이 대가야계 토기로 낙동강을 통해 인적 · 물적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24호분 석곽묘에서 단야구가 출토되어 무덤의 주인이 철기제작과 관련되었음을 알려준다. 수전에서는 사람발자국과 소발자국이 열을 지어 확인되어, 농경에 소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창원 대평리유적

대평리유적은 고성 · 함안 · 마산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며, 고분군, 취락, 패총이 확인된 복합유적이다. 고분군에서는 4~6세기대의 목곽묘 · 석곽묘 · 석실묘가 확인되어 가야고분의 묘제변천을 보여준다.
아라가아계 토기를 비롯하여 소가야계, 신라계, 왜계 등 다양한 지역색을 가진 토기가 다량 출토되어, 주변 정치집단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함안 오곡리유적

함안 오곡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 취락과 구상유구를 비롯하여 가야시대 고분군과 취락,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기와 가마와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고분군에서는 목곽묘 · 석곽묘 · 봉토분이 확인되었다. 목곽묘는 목곽묘에서 석곽묘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석곽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체로 아라가야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으며, 인근 소가야계 토기, 대가야계 토기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함안 말이산고분군 14-1호, 14-2호

함안 말이산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중심고분군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이마니시류에 의해 1917년 4호분이 정식 보고 되었다.
1986년 우리나라 연구자에 의한 최초의 발굴로, 창원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4-1호, 14-2호가 조사되었다.
발굴된 고분 2기는 모두 아라가야 최고위계의 무덤인 세장방형 수혈식석곽묘이며 매장 주체시설이 지하에 위치한 대형봉토분으로 확인되었다.

교류와 교역의 중심지 창원

강과 바다는 예부터 생산 활동의 중심지이자 중요한 교통로였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특히 가야시대 창원은 낙동강과 마산만을 통한 교류와 교역의 중심지였다. 성운경 · 오수전 · 금형대구 등의 중국 한나라계 유물, 연질내만구연호 · 동촉 · 방제경 · 이모가이 조개 등의 왜계 유물, 왜계 무덤, 조족문토기 · 유공광구소호 · 장군형토기 등의 백제계 유물, 이밖에 신라, 소가야, 대가야, 아라가야계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당시 창원은 국제무역항이었다.

철의 제작과 유통

고대사회에서 철 생간과 철제품의 보급은 사회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의하면 변 · 진한 지역에서 생산된 철은 화폐로 사용되었으며 낙랑과 대방, 왜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창원지역에서는 성산패총, 봉림동유적, 현동유적에서 제철유적이 확인되었다. 또한 창원 반계동고분군 24호 석곽묘에서 출토된 단야구는 유적 주변 어딘가에 제철관련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다호리 유적에서는 철의 교역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창원지역은 예로부터 철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생산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새로운 토기문화

와질토기는 단단하기가 기와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져 이전 시기 토기보다 얇고 단단한 편이지만, 도질토기 보다는 흡수성이 강하다.
와질토기는 1~3세기 영남지역에서 유행하였고, 제작기술 · 정면기법에 따라 고식 · 신식으로 구분된다. 고식와질토기는 목관묘가 채용된 시기에 제작되었고, 쇠뿔잡이항아리, 주머니호 등이 있다. 신식와질토기는 노형토기, 오리모양토기, 고배, 대부직구호 등 기종이 다양해지고 목곽묘와 같이 출현한다.

울산 다운동유적과 목관묘문화

울산 다운동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부터 삼한 · 삼국시대 고분군이 조사되었다. 고분군에서는 2~7세기에 걸쳐 삼한 · 삼국시대의 목관묘 · 목곽묘 · 석곽묘 · 석실분이 시대 순으로 확인된다.
다운동유적에서 확인되는 목관묘는 무덤 주변에 도랑을 판 주구목관묘이다. 이런 형식은 주로 마한에서 보이는 묘제이며 울산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조사되어 주목을 받았다.
유물은 목관 내외부에서 칠기, 철기, 토기 등이 확인되며, 토기는 목관 상부 혹은 충진토 내에 부장되었다. 목관의 형태는 대부분 네 개의 합판을 ‘ㅍ’자 형태로 만든 상자모양관이지만, 나-19호에는 구유모양의 통나무관을 사용하였다.

울산 중산리유적과 목곽묘문화

울산 중산리유적은 울산에서 경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하며 2~7세기에 걸쳐 긴 시간동안 조영된 신라 고분군이다.
1991-94년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약 600여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각 시기에 따른 묘제 및 유물의 변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어 신라고분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다.
목곽묘는 영남지방에서 2세기 후반 처음 나타났으며, 신라와 가야 고분의 중심 묘제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묘광과 목곽 사이를 흙으로만 채웟으나, 점차 돌을 함께 사용하는 단계로 변화하였다.

단단한 토기의 등장

도질토기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유행한 삼국시대 토기로 ‘회청색 경질토기’ 라고도 불리며 신라 · 가야 토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와질토기 보다 높은 온도에서 구워져 쇳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하며, 흡수성은 거의 없다. 유리질의 피막이 토기 전면을 덮고 있으며, 간혹 자연유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도질토기의 등장으로 김해 · 함안 · 고령 · 고성 · 창녕 · 경주 등의 지역에서는 다양한 토기문화가 발전한다. 이러한 토기문화는 일본의 고훈시대 스에키의 발생 및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목곽묘

중산리유적은 목곽묘의 발전양상을 잘 보여준다. 2세기 후반 중산리유적에 처음 목곽묘가 출현하는데, 무덤의 평면 형태는 방형에 가까우며 VII-1호 · 4호가 여기에 해당된다. 철기 유물 중심으로 부장이 이루어지고, 이전 시기의 목곽묘 전통이 일부 남아 있다.
3세기에 들어와 목곽이 장방형으로 되면서 발치에 토기만 열을 지어 부장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이후 부장 유물의 증가로 따로 부곽이 마련되고, 무덤의 형태도 좁고 긴 형태로 변화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 · 부곽의 배치양상은 다양해진다.
4세기대에는 묘광과 목곽 사이에 돌을 채우는 무덤이 등장한다. 이후 매장주체 주변에 호석을 배치하고 목곽 상부에 돌을 쌓는 등 신라 적석목곽묘와 유사한 형태로 변화한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창원

가야문화권에 속했던 창원지역은 대외교역을 통하여 발전하였고, 백제와 왜의 교류를 중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532년 김해 가락국 멸망 이후 신라에 복속되어 굴자군이 되었으며, 이후 757년 의안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여 · 몽 연합군의 일본정벌 전초기지로 이용되었으며, 그 공으로 1282년 창원지역 의안군이 의창현으로, 마산지역 합포현이 회원현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초 1408년에 의창현과 회원현을 병합하여 창원부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昌原’ 이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가야에서 신라로의 변화

가야가 신라사회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장례문화도 변화한다. 목곽묘와 석곽묘는 점차 사라지고 석실묘가 축조된다. 석실묘는 추가장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가족, 친족 등이 하나의 무덤에 묻히기도 하였다.
새로운 무덤의 등장과 함께 부장품이 줄어들고, 부장품으로 가야토기는 점차 사라지고, 인화문토기 단각고배 등 신라 후기양식 토기가 출토된다.

고려 청자,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

청자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자기로 9~10세기경 전통 토기제작 기술의 바탕에 중국의 제작기술이 더해져 만들어졌다. 11~12세기 고려청자는 상감기법과 탁월한 비색으로 이름 나 중국, 일본 등 다양한 국가에 널리 수출되었다. 진해 태평동요지에서 12세기 고려시대 자기요지가 발굴되었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 변화하여 16세기 중엽까지 만들어졌다. 귀족적인 고려청자와는 달리 서정적인 활발함과 생동감이 들어난다. 진해 웅천도요지에서는 15~16세기에 분청사기를 제작하였다.
백자는 순백색의 절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이며, 분청자기와는 달리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도자문화를 이끌었다. 백자는 조선시대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수복강녕

창원지역의 고려 · 조선시대 무덤은 현재와 유사한 목관묘의 형태이며, 부속시설로 감실이 확인되기도 한다. 유물은 대체로 감실과 목관 내부에서 대접 · 병 · 청동합 · 청동수저 · 머리뒤꽂이 · 벼루 등이 출토된다.
동계동 14호 조선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은제방울은 방울 상부에 ‘壽福康寧’ 이 새겨져 있으며, 각 글자 사이에 별모양의 은판을 구부려 만든 꽃 장식을 붙였다 . 오래 살고 복되며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
가음정동 조선시대 무덤의 감실에서는 분청철화모란문반구병과 백자접시 · 청동합 · 수저가 출토되어 창원지역 도자문화를 엿볼 수 있다.

영혼의 전달자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큰 새의 깃털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죽은자가 날아오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처럼 동이족에게 새는 사람의 뜻을 하늘에 전하고, 죽은 자의 영혼을 신의 세계로 데려가는 존재로 여겨졌다.
오리모양토기는 우리나라 동남부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출토되는데, 크기와 모양은 다양하다. 몸통은 속이 비어 있고 등과 꼬리 부분에 있는 구멍으로 액체를 담거나 따를 수 있어, 의례용으로 추정된다.

갑옷과 투구 : 제철기술의 꽃-갑옷과 투구

갑옷과 투구는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장비이다. 처음에는 나무와 가죽 등을 사용하다가 4세기부터 철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낙동강 하류에 집중 분포한다.

갑옷은 판갑옷과 비늘갑옷으로 나뉜다.
울산 중산리유적에서 출토된 갑옷은 판갑옷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것에 속한다. 갑옷에 촘촘히 나있는 구멍에 가죽끈을 이용하여 갑옷을 착용하였다.
투구는 갑옷과 함께 대표적인 방어용 무구로서 형태가 다양하다.. 중산리유적 출토 투구는 종장판주로 가늘고 긴 철판을 이어 만들고, 최상단에 반원형으로 복발이 놓인 형태이다.
가느다란 철판은 모두 가죽끈으로 연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