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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하와이를 보다." 
 
 1902년 12월 인천에서 121명의 한국인을 태운 갤릭호가 하와이로 향하면서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이민이 시작되었고, 이후 1905년까지 약 7천여 명의 노동자가 하와이로 이주했습니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들은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지만 꿈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인회와 군대를 조직하고 의연금 기부에 나서는 등 독립운동의 숨은 주역이 되기도 했습니다. 창원대학교 박물관은 2019년과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하와이 현지에서 이민 1세의 묘지를 조사하면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그분들의 이야기를 역사로 복원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중간보고의 성격을 갖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묘비를 중심으로 여러 자료를 통해서 드러난 그분들의 삶의 궤적을 보여드리는 한편, 이들 하와이 동포의 안중근 의사를 위한 성금 모금과 관련하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중근의사 유묵도 함께 전시함으로써 당시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들어가며 
 
 한인 1세대들의 무덤 역시 시나브로 파괴되어 가고 있다. 그들의 묘비에서 고향, 종교, 직업, 나이, 가족, 정체성 등 그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일생이 담겨져 있다. 특히, 이역만리 타국에 있으면서도 조선인(朝鮮人), 대한인(大韓人) 등을 묘비에 새겨놓아 마지막까지 자신의 조국을 잊지 않으려는 모습도 보여준다. 하지만 이민 3·4세대들은 비석에 새겨진 한자, 한글을 알아보지 못해 선조의 무덤이 어느 것인지, 누구인지,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한 채 비석은 사라져 가고 있다. 앞으로 묘비마저 사라진다면 그들이 하와이에서 생존했던 삶의 기록은 영영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남긴 애국심과 삶의 궤적을 기록한다
 
 
박춘하(CHOON HA PARK) 1880.10.23.∼1956.03.22. / 76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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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춘하 묘비 탁본


 박춘하는 인천 영종도 출신이며, 1905년 2월 2일 Coptic호를 타고 하와이로 왔다. 25살의 나이에 홀로 이주했으나, 비석에 ‘아부지’라 적혀 있는 것을 보아 하와이에 이주한 이후 현지에서 가정을 다시 꾸린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비석은 힐로 알라에 공동 묘지에 있다
 
박기옥(朴基옥) 1877.∼1941. / 64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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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옥 묘비 탁본
 
 박기옥은 경성 애오개(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 일 대) 출신이다. 하와이 선박부에 동일인은 있으나 비석에 기재된 나이와 달라 특정할 수 없다. 무덤은 시멘트를 사용하여 덮었고 그 위에는 비문이 확인된다. 표면에는 손바닥으로 문질러서 표면을 정돈하고 손가락으로 비문을 썼다. 힐로지역 묘비를 주문제작한 것에 비 해 이 묘지에서는 자체적으로 제작을 하였다. 박기옥의 비석이 당시 한인들의 묘비 제작방식을 잘 보여준다. 현재 묘비는 코나 Holualoa 커피농장 공동묘지에 있다.
 
 
이휘봉(李輝鳳) ?~1942.02.15. / 63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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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휘봉 묘비 탁본

 
 이휘봉은 사산 출신(지역 특정 불가)으로 26살이던 1905 년 4월 13일 Korea호를 타고 하와이에 입도하였다. 이휘봉의 묘비는 시멘트 재질로, 세월이 흐르면서 비문의 마모 가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묘비석의 좌측면에 위치한 비문 역시 해독할 수 없으나 인근 묘비와 비교해 보았을 때 좌측면에는 고향이 적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측면에는 사망일이 1942년 2월 15일(一千九百 四十二年 二月十五日)로 희미하게 적혀 있다. 비석 전면에는 대한인(大韓人)이 새겨져 있어 조국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고자 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현재 묘비는 힐로 알라에 공동묘지에 있다.
 
 
최형준(崔亨俊) 1885.03.11.∼1922.07.20. / 37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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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준 묘비                                            최형준 묘비 탁본

 
 최형준은 평안도 안주군 연동(현재 평안남도 안주시) 출신으로 광주 최씨이다. 19살인 1904년 7월 30일 Doric 호를 타고 하와이에 입도하였다. 미혼인 그는 하와이에 들어와 결혼하였는데, 슬하에 아들 3명을 두었다. [장 남: 정원(正元), 차남: 도원(道元), 삼남: 인원(寅元)] 그는 1909~1910년에 모집한 안중근 의사 구제 의연금에 0.5$, 1909년 대한인국민회 회비를 납부하였다. 최형준의 묘비는 가장 한국적인 묘비이다. 묘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지붕돌이 있는 형태이다. 묘비 상부 중앙에는 최형준이 안경을 쓰고 서양식 복식을 한 모습이 찍혀있다. 현재 비석은 힐로 알라에 공동묘지에 있다. 
 
 
이창환(LEE CHUNG HWAN) 1884.∼1954.07. / 70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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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환 묘비                                                                      이창환 묘비 탁본
 
 이창환은 황해남도 장연군 빙현동(현재 황해남도 장연군 장연면·설산면 일대) 출신이다. 20살이던 1904년 11월 2 일 Manchuria호를 타고 하와이에 왔다. 선박부에는 미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가족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1942년 하와이 코나지역의 호노노 (Honaunau) 지역에 거주한 것을 확인하였다. 현재 묘비는 코나 캡틴쿡 카히코루(St. John the Baptist Catholic Church) 공동 묘지에 있다. 
 
 
김재신(金在信) 1879.∼1954.02.05. / 75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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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신 묘비                                   김재신 묘비 탁본
 
 김재신은 평안남도 평양부 홍문거리(현재 평안남도 평양 시 홍문동) 출신으로 26살인 1905년 4월 13일 Korea호를 타고 하와이에 왔다. 묘비의 전면에 ‘김저신’으로 새겨져 있는데, 선박부를 통해 '김재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홀로 입도하였으며, 1913년 9월 평안북도 출신의 이말분(Yi, Mal-bun , 李末分)을 위해 여권을 발급한 기록이 확인된다. 김재신은 1909∼1910년 안중근 의사 구제 의연금 모금에 1$을 성금했으며, 1941년 독립금 공고서에 2$를 납부한 기록이 있다. 1942년 한인 등록명단에서 하와이 빅아일랜드 호노카 (Honokaa) 지역 Haine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 재 묘비는 힐로 알라에 공동묘지에 있다.
 
이명운(李明雲) ?∼1934.05.12. / 사망 당시 나이 미상
 
   이명운 묘비                                                    이명운 묘비 탁본
 
 이명운은 경상북도 청하군 건리동(?)(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일대) 출신으로 경주 이씨이다. 선박부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어 하와이 입도시기를 알 수 없다. 1922년 5월 경남 출신 정양순(鄭良順, Chŏng, Yangsun)을 위해 여권을 발급한 기록이 확인된다. 슬하에 2남 2녀을 두었다. 묘비 조사과정에서 이명운의 손녀인 한인 3세 리아 리(Rhea R. Lee-Moku)와 남편이 방문하였 는데,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기억나지 않고 할머니 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다고 하였다. 손녀에 의하면 할머니 이름은 '영희'로 기억하고 있어 여권 발급 기록에서 확 인되는 정양순과는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억하는 '영희' 할머니는 첫 정혼자에게 엄지 손가락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거절당했다. 하지만 이명운은 그녀의 딱 한 처지를 보고 결혼해 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묘지를 찾아와도 한자를 읽을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조사과정에서 탁본을 통해 비석의 글자를 읽어 주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할아버지의 고향과 이름을 알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현재 묘비는 힐로 알라에 공동묘지에 있다.
 
 
 김임야물(YA MUL LIM KIM) 1902.07.07.∼1984.06.09. / 82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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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임야물 묘비 탁본
 
 임야물은 경상남도 남해군 출신으로 2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박도삼의 아내로 1922년 20살에 하와이에 입도 하였다. 처음 결혼한 박도삼이 통조림 공장에서 번 돈을 술과 노름 등으로 탕진하는 등 순탄하지 않아 둘째 딸의 출생 이후 이혼을 했다. 두 번째 결혼은 김인기와 결혼했는데,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다. 이름도 남편의 성을 따라 김임야물이 되었다. 8남매 중 막내아들이 전 하와이섬 시장인 Harry Kim이다. 하지만 남편은 1950년대에 사망했다고 한다. 임야물의 가족들은 부친의 사망후, 하와이 전통공예인 라우할라 (Lauhala, 돗자리 등) 만드는 일을 했다. 그리고 막내아들인 Harry Kim과 함께 가장 적은 자본으로 할 수 있는 김치를 담가 판매하였다. 아들 Harry Kim은 하와이 최초로 한국계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3선을 하였다. 임야물은 하와이 최초 한국계 시장을 둔 어머니이다.
 
 
 정박순이(SOON YEE PARK CHUNG) 1901.10.26.∼1987.08.04. / 86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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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박순이 묘비 탁본
 
 박순이는 경상도 출신으로 최준여의 여권 17살이던 1918년 하와이에 입도하였다. 남편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하와이에서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이름이 정박순이가 되 었다. 박순이의 후손으로는 Aaron Chung 힐로 시의원이 있다. Aaron Chung에 의하면 박순이는 비슷한 시기에 입도한 임야물과 언니·동생하는 사이로 지내면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버텨냈다고 한다. 나중에는 박순이가 치매에 걸려 병세가 악화될 때도 임야물이 가족과 같이 박순이를 간호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임야물과 박순이의 무덤은 나란히 위치한다.
 
 
남순명(南順明) 1878.∼1936. / 58세 사망
남성애(南聖愛) 1921.∼1923.03.22. / 2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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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애 묘비 탁본(전면)                    (후면)                     
 
 남순명은 전라남도 순천군(현재 전라남도 순천시) 출신으로 선박부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25∼27살에 하와이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아내인 김순남은 경남 출신으로 1914년 남순명이 발급한 여권 기록에서 확인된다. 비석에는 자녀가 4남 2녀로 새겨져 있으나 남순명의 자녀는 이 외에도 남성애가 있다. 남성애는 1921년 출생하여 1923년 2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남순명의 비석에 새겨진 자녀 중 장녀 승의 이후로 태어난 자녀인 것으로 보인다, 비신 전면 상부에 십자가와 우측면의 구주강생(救主降生)이 새겨져 있어 기독교인 임을 알 수 있다. 측면에 새겨진 ‘후인(后人)’이란 조상에 대한 후손이라는 뜻으로 본관을 앞에 넣어 비석의 전면에 새기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는 멀리 타향에 있지만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1942년 하와이 한인 등 록명단에서 장남 남승학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있어 남순명 의 사망 후 하와이 파일로(Paauilo)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 된다. 남순명의 묘비는 힐로 알라에 묘지에 있다.
 
 
권세흥(KWAN SAI HUNG) 1921.02.15.∼1922.12.21. / 1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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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세흥 묘비 탁본
 
 권세흥은 경상북도 출신의 권인선(Kwŏn, In-sŏn, ? ∼?)과 부산 출신의 사진신부 김순이(Kim, Sun-i, 1897.5.15.∼?)의 아들이다. 어머니인 김순이가 1919년 22살에 하와이에 입도한 후 가진 자식으로 하와이에서 태 어났다. 돌이 채 지나기 전인 9개월 24일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인근에는 권인선과 김순이 사이에서 권세흥 이후에 태어난 권성애(Kwon Sung Ai)의 묘가 있다. 권성애는 1927년 7월 3일에 태어나 1929년 5월 7일에 사망 하였다. 두 묘비 모두 제작소에서 영문으로 새겨온 후 아이의 한글 이름을 직접 긁어서 새겨 넣었다. 어머니 김순이는 1978년 해외 최초의 한인교회인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 인근인 1333 Heulu St. Apt 거주하였다. 권세흥의 묘비는 오하우 섬 푸우이키 공동묘지에 있다.
 
 
류석화(劉碩華, SUK WHA LYU) 1877.08.21.∼1929.10.29. / 52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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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석화 묘비                                                                류석화 묘비 탁본
 
 류석화는 평안북도 의주 옥상면 삼상단(현재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삼상동) 출신으로 처음 이주할 때는 아내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하지 않았다. 그는 네 아들을 연이어 잃자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기독교 국가에서 살고 싶어 하였다. 어느 날 소를 팔러 시장에 갔다가 하와이 이주민 공고문을 보고 하와이에 이주하기로 마음 먹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채 1904년 인천항에서 Korea호에 올라탔다. 류석화는 1904년 3월 6일 대한제국 외부에서 10냥을 내고, 집조(여권)을 발급 받아 1904년 3월 30일에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 1909년 12월에 빅 아일랜드 파할라 농장에서 일하며 안중근 의사 의연금 모금 운동에 1$를 성금하였다. 성화의 입국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1911년이 되어서야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하와이에서 태어난 딸 Marion Lyu Kim에게 자신은 남편이 사고를 당한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몇 년 동 안 몹시 슬퍼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류석화의 가족은 빅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커피를 재배 하였다. 현재 류석화의 묘비는 힐로 알라에 공동묘지에 있다.
 
 
곽일선(郭逸善) 1866.∼1937.10. / 71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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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일선 묘비                                                    곽일선 묘비 탁본
 
 곽일선은 배실 출신으로 ‘배실’이라는 지명이 전국적으로 확인되어 고향을 특정할 수 없다. 1904년 12월 9일 Mongolia호를 타고 하와이에 입도하였다. 당시 38살의 나이로 홀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1909∼1910년 안중근 의사 의연금 납부 때 10$를 납부 하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하와이의 이주민들은 대개 사 탕수수와 파인애플농장에서 일했는데, 한달에 4번 쉬고 매일 10시간씩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받은 월급은 평균 17$이었다. 곽일선이 의연금으로 기부한 10$는 월급의 3/4를 고국 의 얼굴도 모르는 독립운동가에게 준 것이다. 이외에도 곽일선의 묘비에는 ‘조선인(朝鮮人)’이라 새겨 져 있는데, 국권이 피탈되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모습이 보인다. 현재 묘비는 힐로 알라에 공동묘지 에 있다.
 
 
김이행 1875∼1953.08.01. / 78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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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행 묘비 탁본(전면)                          (후면)
 
 김이행은 평양 서촌 정동 출신으로 선박부에서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03∼1905년인 28∼ 30살에 입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1년 독립금 공고서에 15$를 납부하기로 예약한 기록이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고리병준부인立’이라 새겨져 있는데, 이병준의 부인이 김이행이 사망한 뒤 비석을 세워 준 것으로 보인다. 
 
 
 
"하와이에서 안중근을 만나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사형언도를 받고 중국 여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하기 전인 1910년 2월 14일부터 집행 때인 3월 26일까지 40여 일 동안에 쓰여진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최근 지정된 5점의 유묵을 합하면 총 31점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의사의 자서전에 의하면 법원과 감독의 관리들이 안중근 의사의 필적을 기념하려고 유묵을 요청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존하는 유묵은 일 제강점기 이후 한국인이 일본인에게서 구매하여 기증한 것이 대다수라고 한다. 삶의 마지막에 써내려간 유묵에는 같은 문장이 하나도 없고, 『논어』 등 의 중국의 역사서와 시도 두루 인용 하였다. 인용한 글귀를 통해 안중 근 의사의 삶, 학식, 정신, 사상,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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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 유묵-청초당(靑草塘)

 

지정

보물 (지정 1972. 8.16.)

내용

청초당(靑草塘)은 사형 이틀 전인 1910년 3월 24일 여순 감옥에서 쓴 안중근 의사의 최후의 유묵이다. ‘풀이 푸르게 돋는 언덕(제방)’이라는 뜻

으로 봄에 풀이 푸르게 돋아나듯이 우리나라도 독립이 올 것을 암시하는 안중근 의사의 소망을 담은 글귀이다

크기

6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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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 유묵-임적선진위장의무(臨敵先進爲將義務)

 

지정

보물 (지정 2007.10.24.)

내용

임적선진위장의무(臨敵先進爲將義務)은 사형 직전인 1910년 3월 여순 감옥에서 쓴 친필유묵으로 적을 맞아 앞장서 나가는 것은 장수의 의무

이다라는 뜻이다군인이자 장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을 잘 드러낸 유묵이다.

크기

35×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