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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제암문(널리 세상을 구제하라)

인류는 자연에서 태어나, 그 자연에 무엇인가 기록하고 그리면서 성장하여 드디어 자연을 지배해나갔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유한한 생명을 넘어 만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돌石 과 쇠金에 무엇인가 새기기 시작하면서, 저 무심한 돌과 쇠는 지울 수 없는 역사가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말을 걸고 있습니다. 무릇 문화재는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지만, 돌과 쇠에 새긴 글자와 문양은 탁본의 묵향을 통해야만 서체와 문양의 아름다움과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심오함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간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는 기회 있을 때 마다 중요한 암벽, 비석, 불상, 종 등에 새겨진 글자와 문양들을 탁본하였습니다. 이번 기획전시전에서 소장 탁본 중에서도 우수한 작품들을 선정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대학도 궁극에서는 “널리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 소명인 바 “광제암문 廣濟嵒門”으로 시작하여, 한자와 중국 문화를 도입하여 도약하던 신라의 순박한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글씨, 고급종교 불교가 아름다운 종·불상·부도로 남은 모습, 통일신라 말기 난세의 선지자 최치원의 유랑 흔적, 충무공 이순신을 기린 비 등을 엮었으며, 동아시아 대륙과 해양 사이에 있는 한반도에서 경남이 바로 핵심 요충지대임을 증명하는 한중일 삼국의 비문으로 마감하였습니다. 돌과 쇠에 새긴 그 간절함이 여러분의 마음과도 소통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사진

진감선사

진감선사 혜소(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804년 30세의 나이에 당나라로 가서 출가하여 숭산의 유명한 소림사에서 스님이 되었다. 830년 신라에 돌아와 만년에 지리산 옥천사(현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이 비는 887년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제목인 전액과 본물 글씨까지 쓴 것으로 유일하며, 추사 김정희 등 여러 전문가들이 찬탄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전액은 버드나무잎과 같은 ‘유엽전’ 내지 새 발자국 같은 ‘조적연’으로 특이하다. 특히 “당해동고진감선사비” 중에서 첫 글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唐’ 자의 특이한 고어체인데, 혹자는 양으로 읽기도 한다.
비문의 1행은 최치원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전액까지 썼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름 앞에 “賜紫金魚袋”라 표기하여 자신이 중국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것을 특별히 자부하고 있다. 2행부터 본문으로 “夫道不遠人 人無異國(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사람은 국가를 넘어 다름이 없다)” 라는 진리의 보편성으로 시작하여 2,417자가 정갈한 구양순체로 쓰여 있다. 이 귀중한 비에 한국전쟁 당시의 총흔이 남아 있고, 오랜 세월로 망실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1725년 비석의 문장을 목판에 새긴 것이 남아 있어 그 내용은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 사진

선지자 최치원의 흔적들

최치원(857~?)은 통일신라 말기 유교는 물론 불교와 도교까지 능통한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열두 살에 중국 유학길에 올라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879년 ‘황소의 난’ 당시 <토황소격문>으로 문명을 떨치고, 882년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884년 신라로 귀국하여 개혁안<시무책>10여 조를 올렸으나, 중앙 귀족들의 반대로 개혁의 한계에 부딪히자, 이후 유랑과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때 그가 즐겨 찾은 곳이 부산의 해운대,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합포현(지금의 창원) 등 경남 일대가 많았다. 최치원은 최근 한중 우호와 교류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더욱 추앙받는데, 2007년 중국 양저우에는<최치원기념관>이 건립되어 매년 10월 15일 제향 행사가 열리고 있다.

신라 사진

신라 : 한자 석각 초기의 풍경

인간이 문자를 만듦으로서 역사를 기록하게 되고, 특히 중요한 것은 바위에 새겨 만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삼국은 중국의 문물, 특히 한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지식과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시기 당대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빈곤하여 초기 한자 금석문은 더욱 귀중한 가치가 있다.
삼국 중에서 가장 후천적으로 출발한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한자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여진다. 고구려<광개토대왕비> (414년)는 해서적 요소가 많은 예서체인데, 창녕의<진흥왕척경비> (516년)은 이와 유사하면서 해서체적 요소가 좀더 강하고, 울주<천전리각석>에는 고구려에서 사용되던 이체자가 보인다.
신라도 삼국통일 이후 8~9세기에 이르던 당의 문물과 서체를 시간차 없이 수용하고 능란하게 소화한다. 그러나, 한자를 도입하던 초기의 석각에서는 통일이후 완숙기에는 볼 수 없는 서툰 듯 소박하면서도 검박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부처님의 면모와 깨달음의 소리 사진

부처님의 면모와 깨달음의 소리

불교미술은 예배의 대상 또는 교화 활동, 불교 의식의 필요에 의해서 발생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불상을 대신하여 불족이나 법륜을 그려 놓고 신앙하거나 보리수 등의 상징적 대상물을 예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조형 예술이 점차 체계를 갖추어 감에 따라서 그 신앙의 2대 중심은 결국 불탑과 불상으로 귀착되어 갔다. 또한, 한국 불교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 종이다. 한국 사찰의 종은 조형적으로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소리 또한 신묘하다. 불상과 불탑, 그리고 종을 통해서 부처님을 향한 구도자들의 종교적 염원을 만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순국과 기념 사진

충무공 이순신, 순국과 기념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다. 1576년 32세로 늦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으나, 변방과 말직으로 돌아 다녔다. 1591년 장군은 47세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진왜란을 맞이하였다. 임진·정유 7년간 전쟁에서 충무공이 활약한 주 무대가 남해안이라, 경남 남해안에는 충무공 관련 귀한 유적이 적지 않다. 이순신 장군이 첫 승리를 거둔 곳이 거제 옥포이며(옥포해전), 그 유명한 한산대첩의 현장이 통영 앞바다이며, 마지막 순국하신 곳이 남해 노령바다이다. 이 충무공은 세계적으로 빼어난 수군 제독일 뿐만 아니라, 『난중일기』로 전쟁 당시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 역사가이시며,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는 절절한 심정으로 내면을 노래한 시인이다.

한반도, 대륙과 해양 사이 사진

한반도, 대륙과 해양 사이

한반도 남해안은 일찍부터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이 소통하는 전략적 가교로서 그 지정학적·지경학적·군사 전략적 위상이 한반도의 어느 곳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아득한 고대부터 현재까지 남해안은 평화시에는 대륙과 해양 사이 문명과 물류의 교량이었으며, 전시에는 양 세력의 역사적 승패를 가른 요충지였다.
그러나 남해안에 산재한 많은 국제적 유적들은 우리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는 침략 패배 식민의 부정적 역사라는 이유로 유물과 유적은 외면 내지 방치되거나 훼손되고 있다. 여기서는 역사의 “흔적 없애기”가 아니라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경남과 남해안의 국제 내지 외세 관련 금석문을 배치하였다.

남해 만세덕동정마애비사진

남해 만세덕동정마애비

이 비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 만세덕 장군의 전공을 칭송한 비이다. 만세덕은 부산 만공단과 오륙도 비석 섬에도 기념비가 있었을 정도로 저명한 명나라 장군이다. 부산의 비들이 모두 없어져서, 지금은 남해의 이 비가 유일한 만세덕 기념비이다. 자연석을 깎아 내어 비문을 썼기 때문에 마애비, 첫 줄에 ‘동정시’라는 제목이 있어 ‘동정시비’ 라고도 부른다.
1598년 노량해전 당시 배가 좌초되어 관음포에 상륙한 왜군은 남해를 가로질러 이곳 선소라왜성으로 와서 다시 바다를 통해 도망하였다. 임진·정유왜란 7년간 전쟁의 최후의 전쟁 유적인 선소리 해안가 자연 암반에 각자부를 만들고 5cm 정도의 깊이로 글자를 새겨, 거대한 명군 승전 기념비를 만들었다. 비문에서 황제를 의미하는 “天子”, “天王”, “皇”자는 모두 행을 바꿔 두 글자씩 높였으며, 테두리는 당초문으로 장식하여 장엄한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귀한 마애비이다.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많은 내용을 알려주고 있지만, 안내문들은 틀린 내용이 많다. 먼저 비명을 칭송 대상에 따라 “만세덕비”라 해야 하는데, 비를 세운 “장량상비”라 일컫거나, 심지어 “이여송과 진린의 전승 기념비”라고도 한다. 또 1599년 “陽月(음 10월) 上浣(상순)”에 세웠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도 “언제 쓰였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